구호세계의 정점에 이르기까지 에디오피아인의 인도주의 오디세이
구호세계의 정점에 이르기까지 에디오피아인의 인도주의 오디세이
구호세계의 정점에 이르기까지에디오피아인의 인도주의 오디세이

베켈 젤레타(오른쪽의 붉은 셔츠)가 올해 초 떠난 현지 출장 중에
나이제리아 적십자사의 봉사자들을 만나고 있다.
제네바, 12월15일(유엔난민기구)-국제적십자사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 Red Crescent Societies, IFRC)의 사무총장이면서 에디오피아 정치인이자 외교관 및 난민이었던 베켈 젤레타(Bekele Geleta)는 인도주의적 구호세계의 정점에 서 있다. IFRC는 세계 최대의 인도주의적 네트워크이며 자연재해나 기술로 인한 재앙 및 보건위기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 -강제 실향민 포함 -을 위한 긴급 국제 구호활동을 조율한다. IFRC는 또한 장기적인 개발활동과 인도주의적 외교에도 참여한다. IFRC는50년이 넘는 기간동안 유엔난민기구와 긴밀히 협력 해왔고, 1957년에는 헝가리 난민들의 구호활동을 도운 공적으로 영예로운 난센 난민상(Nansen Refugee Award)을 수여받았다.젤레타 사무총장은1995년에IFRC에 참여하였지만,에디오피아의 소박한 출생지에서 제네바에 있는IFRC의 사무국에 오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한 여정의 연속이었다.그는 올 초에 유엔난민기구의 웹 에디터인 리오 돕스(Leo Dobbs)와 하우드 모렐(Houde Morel)에게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다음은 인터뷰를 요약한 내용이다:
인생 초반에 대해서 조금 말씀해 주세요
저는 에디오피아에 있는 넷조(Nedjo)라는 곳에서 태어났고,그곳은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보다 수단과의 국경에 더 가까운 곳이었습니다.우리는 스웨덴의 미션스쿨에서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매우 이른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그 후에는,이전에 월레가(Wollega)였던 지역의 수도인 네켐테(Nekemte)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학교는6일간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어요.학기가 시작되면 저는 그곳으로 걸어갔고,학기가 끝나면 다시 걸어왔습니다.특히 우기에는 더욱 힘들었어요.대학교는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곳으로 다녔고,정치학과 경제학으로 전공 학위로 받고 졸업했습니다.이 때는 에디오피아가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황제의 정권기[1930-1974]였습니다.매우 평화로운 시기였죠.
졸업 후에는 어디에서 일하셨습니까?
저는 내무부에 들어갔습니다 -사실,임명되었죠.그곳에서2년을 있다가 도로 교통국으로 옮겼습니다.그곳에서 영국에 있는 리즈 대학교(Leeds University)에서 교통경제학 석사 공부를 위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공부 후에는 도로 교통국에 다시 돌아가서, 1년 동안 일했습니다.그리고 나니 군대가 정권을 차지했습니다.저는 철도 담당의 부경영자로 임명되었고,몇 달 후에는 최고 경영자가 되었어요.임명된 것이기 때문에 선택권이 없었지요…저는 적자 운영을 하고있던 회사를 흑자로 바꾸었습니다.그 곳에서 몇 년을 일했고,그 후에는 군사정권이 저를 감옥에 넣었습니다[1978-1982].
왜 그렇게 되셨나요?
그들은 제가 인종에 기반한 정치적 단체에 속해 있다고 믿었습니다.사실이 아니었죠.하지만 저는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철도 직원들은 매우 매우 영향력과 파워가 있었죠.아마 노동조합들이 저를 좋아했 던 것 같습니다.제 생각에 제가 너무 인기를 얻고 영향력이 생겼던 것 같아요.당시 정권은 그러한 영향력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전 감옥에5년간 있었습니다.
교도소에는 강력범들과 정부에 반대했던 젊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저희들 중 상당 수가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었어요.교도소 관리인은 상당히 너그러웠고 저희가 스스로 조직해서 교육과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저희는 교도소를 학교로 바꾸었고 도서관을 시작했습니다…관리인들은 또한 학생들이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수년 동안 교도소 학교는 국내에서1위였습니다.우리는 부정적으로 살기보다는 바쁘게 보냈습니다…쓰라린 기분으로 감옥을 나가지 않기 위해서요.그리고 좋은 모습으로 출옥하였습니다.감옥생활이 우리의 삶에 영향은 미쳤지만,그보다 더 안좋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인도주의적 일에 대한 관심은 어디서 시작했습니까?
원래,저는 교도소에서 인도주의적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교도소 개발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고,위원회는 교육,운동,사람들을 한데 모으고,젊은이들을 도우며,강력범들이 그들의 사고와 삶을 개선시키도록 가르치는 것을 관리했습니다.많은 학생들이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갔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1년 동안 비정부기구인 아일랜드 컨선(Irish Concern)에서 일했습니다.컨선은 제가 일했던 첫 번 째 인도주의적 기구입니다.감옥에서 나왔을 때에는 정부에서 일하지 않았어요.그리고 나서 에디오피아 적십자사가1984년에 부서장을 찾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 전화로 인터뷰를 보러 오라고 요청했어요.그래서 인터뷰를 봤고 통과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당시에는 에디오피아의 기근이 최고조였습니다.정말 끔찍한 시기였죠.
적십자사에 계셨을 당시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세요.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에디오피아 적십자사의 사무총장이 저를[실향민들을 위한]첫번 째 텐트가 세워지고 있던 기근이 가장 심한 지역으로 데려갔습니다.정말 끔찍한 광경이었고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거기에서 저는 시작했죠.매일마다 그 난민촌에서만 평균170명이 죽었습니다.우리는 하루종일 일했고,상황을 바꿔 놓았습니다.적십자사의 관점에서는,원조 수혜자들의 수가 첫 한달 반 만에 약9만 명에서45만 명으로 증가했고,점차120만 명이 되었습니다.정부도 꽤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저의 첫번 째 경험은 굶주림과 빈곤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었고,그 후 사무총장으로서는 첫번 째로 수단 난민들,에디오피아에 있는 소말리아 난민들,그리고 심각한 피해를 입은 북부 지역에서부터 서부지역과 좀 더 비옥한 남부 지역 출신의 재정착민들과 함께 일해왔습니다.그것은 일종의 강제 재정착이었습니다.때때로,우리는 씨앗과 농기구 등도 제공했습니다.
후에는 본인도 난민이 되셨죠.
새로운 정부가 권력을 쥐었습니다.그들은 저에게 대사직위를 권유했고 저는 정부가 약속했었던 민주주의를 이행한다는 조건 하에 동의했습니다.하지만 선거 감시자들은 첫번 째 선거가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고 선언했고,저는 양심에 몸부림쳤어요.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저는 당시 일본주재 대사였습니다.정치와 정치적 양심에 싫증이 난,감옥에서 갓 나온 사람이었죠.정말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대사로 계속 있을 것인가,아니면 옮길 것인가?만약 제가 옮기면,어디로 가야하나?에디오피아로 다시 돌아가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야하나?정말 매우 고민스러운 상황였습니다.내가 만약 다른 곳으로 갈 거라면,그게 옳은 것인가?만약 돌아간다면,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가?그냥 조용히 있을까,용기를 내서 말할까,정부에 남을까?그리고 제 자식들의 입장에서 보면,아이들을 모국과 그 문화에서 떠나 이사하게 하는 것이 옳은 결정인가?정말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저는 제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했고,마침내 결정했죠. “그래,이사를 갑시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갈지 앉아서 토론했고 캐나다를 선택했습니다.제가 저의 캐나다 친구들과 요즘 농담할 때면, “내가 캐나다인이 되기로 한 것은 이성적인 선택이었어.출생 사고가 아니었지.그러니까 출생으로 우연히 여기서 태어난 너희들보다 내가 더 훌륭한 캐나다 시민이지.”라고 말합니다.그것은 이성적인 선택이었습니다.저희는1992년8월,수도인 오타와로 떠났습니다.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비자로 캐나다에 도착한 지 한달 여가 지난 후에,저희는 비호를 신청하기 위해 이민국으로 갔습니다.난민 지위를 얻는데2년이 걸렸습니다.그건 저말 또 다른 힘든 시간이었죠…왜냐하면 의존해야 하는 것이 굉장히 고통스러웠으니까요…저의 어린 아이들은 버스로 학교에 통학했습니다.우리는 주거를 제공받고,생활비를 받았습니다.저희를 정말 보살펴 주었던 사회였지만,우리는 전혀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었죠.
제 자신을 보면,교육을 받았고,경험도 풍부하지만 사회에 짐이 되버린 것이죠.캐나다 사회를 몰랐기 때문에 고위직에 채용될 수 없었어요.중간직은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채용될 수 없었어요.또한 하위 직위에서는 제가 자격과잉이었기 때문에 채용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불평을 하지만,저는 캐나다 사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제가 그곳에 갔으니,그것을 수용하고 적응해야지요.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는 시스템이 아닙니다…사회 시스템에 접근하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사람은 저인 것이죠.그게 제가 훈련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직업을 찾으셨습니까?
저는 결심했죠,그래,어디서부터 시작할까?저는 스스로에게 어떤 종류의 직업도 수락하라고 말했습니다.그래서 작은 가게에 가서 약3달 간 직업훈련을 받으며 무급으로 일하기를 자청했습니다.그 후에,저는CARE의 캐나다 인사 담당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그는“당신이15분 후에 오면,제가 당신에게15분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저는15분 뒤에 도착했고 그는 저에게15분 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주었습니다.저희는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 얘기했습니다.그는[1994년에]에 저를 채용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케냐에 있는 소말리아 난민들을 위한 사업 당당관으로 저를 나이로비에 보냈습니다.저는 다답(소말리아인들을 위한 난민촌)에 있는 난민사업을 운영하였습니다.저는 난민촌에 가서 난민촌 텐트에 머물면서 그곳에서6개월간 일했습니다.그리고 나서 여기(제네바에 있는IFRC)에서 공석을 발견했습니다.아프리카 담당관 직위가 공고되어 있었고,저는 지원했습니다.몇 안되는 인터뷰 명단에 들었지요. [젤레타는 직위를 얻었고,그 후 기구의 수장직까지 계속 올라갔다.]
유엔난민기구와의 협력관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는 오랜 기간 함께 일해왔습니다.제가 생각하기에, IFRC와 유엔난민기구의 성공적인 협력관계를 위한 중점 요소 중 하나는,우리가 상호보완한다는 사실입니다.적십자사(Red Cross)와 적신월사(Red Crescent)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유엔난민기구의 난민촌에 있는 보호대상자들에게 식량,물,구호용품,의료서비스 및 심리상담 지원 등을 제공합니다.또한,저는 이 협력관계가 단지 그러한 활동이나 사업 뿐만 아니라,저희가 인도주의적 외교라고 부르는 것도 포함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다시 말해, IFRC와 유엔난민기구는 모두 어떤 이유로든지 강제 실향민이 된 사람들을 대표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인도주의적 외교는 우리에게 최우선의 과제입니다.국제적 수준에서 정부들에게,기부단체들에게,그리고 온 세계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Juan Manuel Santos)콜롬비아 대통령은 이번 홍수를“콜롬비아 역사상 최악의 자연 재해”라고 지칭했다.정부는 홍수 피해자들의 수가2백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측했고,희생자들에 대한 구호와 기반시설 재건축 비용이 미화50억 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