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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로 귀환한 어린 엄마, 새로운 도전과 마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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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로 귀환한 어린 엄마, 새로운 도전과 마주서다

2010년 1월 7일

스리랑카로 귀환한 어린 엄마, 새로운 도전과 마주서다

스리랑카, 바티칼로아, 1월 6일(유엔난민기구) - 카비타 라마니씨의 해맑은 웃음은 어두운 방을 밝힐 수 있으나 몇 년간 스리랑카 북동 지역에서 겪은 신체적 정신적 피로와 고통을 감추진 못한다. 29세의 이 여인의 허리는 구부러졌으며 손과 걸음걸이는 흡사 노파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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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동부 지역의 바티칼로아 지역에서 실향생활을 청산한 과거 실향민들이

생필 구호품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그녀가 드디어 스리랑카 동부 지역의 바티칼로아 지역에 식구들과 같이있다. LTTE(타밀 일람 해방호랑이)과 정부군 사이에 벌인 내전은 오랜 기간 동안 재속되었으며 불과 지난 달에 정부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북부 및 동부 지역의 정부 운영 난민촌에서 155,000명의 스리랑카 시민들이 빠져 나왔으며 아직 110,000명의 주민들이 남아있다.

라마니씨는 조금의 행복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식구들은 새 삶을 다시 시작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다. 더 나아가, 라마니씨의 남편은 LTTE 의 일원의 용의자로 구금되어 있으며, 그녀의 딸은 심각한 건강문제로 특별 관리를 필요로 한다.

이제 그녀는 정부와 유엔난민기구와 같은 국제 기구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유엔난민기구는 거주지 지원과 파손된 집 수리 그리고 모기장, 물통, 조리기구, 담요, 방수포, 위생 용품, 허리케인 램프와 같은 기본 생필품을 지원하고 있다. 세계식량기구는 6개월동안 식량을 제공한다.

라마니씨는 오랜 세월동안 고생했다. 바티칼로아의 파디팔라이 지역 출신으로서, 가족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학업을 13살때 그만둬야 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다. 당시 바티칼로아 지역은 거의 LTTE 지배하에 있었다. LTTE는 1983년 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바티칼로아 지역은 초토화 되었다.

2002년에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평화는 2006년에 다시 깨졌다. 내전이 다시 시작되던 해에 라마니씨의 남편은 LTTE 독립군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는 최북부에 있는 킬인오치치 지역으로 납치되었다.

“LTTE는 저에게 남편을 보고 싶다면, 아이들과 함께 북쪽에 있는 본부로 가도 된다고 했습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추가로 그녀는 “저희가 본부로 갔을때 LTTE는 저희가 다시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저는 해안가에 있는 물란이티부 지역에서 집을 빌려서 세 자녀들과 살아야 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긴 3년간의 고생의 시작이었다. “저희의 유일한 수입원은 작은 채소거리 판매와 가끔식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돈으로 충당했습니다.”고 라마니씨가 설명했다.

라마니씨의 딸의 건강상태는 또 다른 걱정 거리였다. 9살 배기 아이는 유아기 때 뇌종양 판정을 받았으며 그녀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저는 딸의 치료를 위해 콜롬보로 가려고 했지만, 제가 탈출 하기도 전에 전쟁은 물라티부 지역까지 퍼져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2009년 1월에 킬리노치치가 함락한 뒤 정부군은 LTTE의 마지막 요새인 물라티부 지역을 포위했다. 라마니씨의 가족과 수만명의 주민들은 전투 지역에 갇혀 있었으며 안전한 공간을 찾아 구역과 구역 사이를 지나갔다. 라마니씨와 가족은 무사히 혼란을 피해 갔지만, 남편은 다리가 부러져 실향 기간 동안 항시 도움을 필요로 했다.

내전이 끝나고, 라마니씨와 아이들은 북부 바부니야 지역의 정부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남편은 심문을 위해 구금되었다. “그 때 남편을 마지막으로 봤어요. 저는 그이로 부터 몇통의 편지를 받았고 제 시어머니는 한 번 면회를 갔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처음에 난민촌에서의 생활은 고달펐다. 5~6명을 수용하도록 되있는 천막 아래에 4 식구가 살았었다. “좁은 수용 공간으로 인해 수용소에서는 설사와 같은 질병들이 퍼졌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유엔난민기구와 같은 인도적 단체들이 수용소로 출입허가를 받고 나서 상황은 호전됐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라마니씨의 가족들은 식량과 돈을 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을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철창을 넘어야 들어올수 있었다. “저는 단지 집에 가고 싶었어요”라고 라마니씨는 딸의 상태를 걱정하면서 당시 상황을 회고 했다.

9월이 되어서야 그녀의 염원은 현실이 되었다. 라마니씨와 몇 백명의 실향민들은 바티칼로아의 중간 수용소로 옮겨진 후 집으로 갈 수가 있었다.

라마니씨는 26년의 전쟁이 끝난 뒤에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발전을 거듭하여 안정과 평화속에 스리랑카를 바로잡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녀의 사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 딸 걱정과 그리고 정기적인 임금이 없는 상태에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돈을 벌어야 하는 걱정이 태산이다. “저는 미래에 저와 제 가족이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해요,”라고 용감하고 애교있는 웃음으로 그녀는 말을 끝마쳤다.

*성명은 신변 보호를 위해 변경함.

스리랑카, 바티칼로아, 수락사니 페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