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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10대 저널리스트, 용기와 슬픔에 대해 쓰다

뉴스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10대 저널리스트, 용기와 슬픔에 대해 쓰다

2016년 7월 13일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10대 저널리스트, 용기와 슬픔에 대해 쓰다
열일곱 살의 젊은 저널리스트 오미드 아흐마디는 무장대원에게 쫓겨 가족과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카불을 떠났다. 이제는 안전한 장소에서 자신의 여정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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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드 아흐마디와 올 초 그리스의 난민 캠프에서 그에게 영어를 배운 아프가니스탄 소녀와 여성들. ⓒ 오미드 아흐마디 (Omid Ahmadi)

독일, 바트 팔링보슈텔 (Bad Fallingbostel) - 우리는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지만, 때로는 그 반대인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수백 명이 죽어 간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끔찍하고 위험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죽을 곤경에 처했을 때 이 생각을 많이 했다. 생존가능성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몇 시간동안 표류할 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희망 뿐이다. 우리 인간은 희망 없이 단 1초도 살 수 없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우리를 데려간 배는 소형 고무보트였다. 파도가 높게 일었고, 배는 가라앉기 직전이었다. 그리스 쪽에서 구명정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구명정이 도착하자 우리는 도움을 간청했고, 나는 감사하다는 말도 못한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가 보트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우리에게 음식, 차, 바지와 양말을 주었다. 그들은 유엔난민기구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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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그리스로 건너가는 소형 고무보트에 탄 아프가니스탄 학생 저널리스트 오미드 아흐마디와 동료 난민들. ⓒ 오미드 아흐마디 (Omid Ahm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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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일곱 살의 학생 저널리스트는 무장대원들이 그를 찾으러 오자 고국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 오미드 아흐마디 (Omid Ahm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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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세르비아와 헝가리 사이의 국경지역 뢰스케(Roszke)의 통과 지점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 유엔난민기구 / 졸트 발라 (Zsolt Ba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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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드가 터키에서 보트를 타고 그리스에 안전하게 도착한 뒤 아테네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 오미드 아흐마디 (Omid Ahm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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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와 세르비아의 통과 지점이자 유럽으로 들어가는 “합법적인 길.” 하지만 당국에 의해 이러한 통과 지점으로의 입장이 제한되고 있다. ⓒ 유엔난민기구 / 졸트 발라 (Zsolt Balla)

모든 국가에는 해당국의 규칙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에서 머무를 때 그들의 법규를 최대한 준수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거의 석 달을 군부대 내에서 생활했다.

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려고 노력했다. 파슈토, 파르시, 우르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통역을 도와주었고, 비누, 샴푸, 치약, 매트리스, 베개, 이불 등을 분배하는 큰 가게에서 그리스 병사들과 교대 근무를 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소녀와 여성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일이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나는 비용을 받지 않았다. 그들이 지식의 바다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둔지의 담당자 중 한 명이 우리에게 교실을 하나 제공해 주었다.

우리는 평화로운 환경에서 사랑, 연민, 인식과 수용의 씨앗을 뿌렸다.

나는 학생들의 실수를 바로잡아 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식의 세계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평화로운 환경에서 사랑, 연민, 인식과 수용의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나날이 더워지는 날씨에 텐트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다.

여정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그리스를 출발하여,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헝가리를 통과했다. 그 나라들의 국경을 건너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숲을 걸어서 통과하는 것도 힘들었다. 탈진 외에도 식량과 물, 응급처치 용품이 없다는 것이 모두 위험요소였다.

화장실이나 씻을 곳도 없었다. 가족들은 텐트가 있었지만, 나는 밖에서 자야했다.

마침내 나는 세르비아와 헝가리의 국경에 도착하여, 합법적으로 입국하기를 기다리는, 대부분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사람들과 함께 들판에서 18일을 보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내심과 의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끈기가 필요하다.

화장실이나 씻을 곳도 없었다. 가족들은 텐트가 있었지만, 나는 밖에서 자야했다. 카불에 있을 때 빈곤과 노숙에 대해 취재하면서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이제 나는 그 동일한 상황을 직접 겪게 된 것이다.

나는 희망을 잃어갔다. 속으로 “왜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하고 되뇌었다. 눈물을 흘리며 이러한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과연 신은 어떠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는가?” 나는 고통, 실향, 슬픔의 참 의미를 깨달았다.

이것은 고국 아프가니스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현재 독일의 안전한 장소에서 글을 쓰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저널리스트의 이야기를 요악한 것이다.

* 위 기사는 유엔난민기구 기고자 헬런 워막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다.

헬렌의 부연설명:


내가 오미드 아흐마디를 만났을 때 그는 세르비아와 헝가리의 국경에 있는 통과 지점에서 기다리며 절망에 가까워 있었다. 이 17세의 학생 저널리스트는 탈리반을 피해 고국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터키에서부터 위험한 여정을 시작했지만, 들판에 앉아 다음에는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이 여정이 어디에서 끝날 지 모른 채 불안해하고 있었다.

카불에서 오미드는 독립 통신사 <네다-에-아가> (의식의 소리)에서 일했다. 그는 탈리반이 쿤두즈 주로 돌아온 것을 보도한 저널리스트 중 한 명이였다. 그 후, 탈리반 대원들의 그의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다행히 그는 이때 집에 없었다.

“어머니가 도망가라고 경고했다”고 그는 말한다.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혼자 도망쳤다.”

헝가리 뢰스케(Roszke)의 들판에서 오미드는 그 곳의 힘든 생활을 고향에서의 생활과 비교했다. “나에겐 여러 종류의 책이 있었고, 저널리즘, 심리학, 철학 등을 공부했다. 공부에 푹 빠져있었다. 나에게 공부란 마치 무한한 열매를 주는 나무 같았다.”

일시적으로 그는 막다른 길에 다다라 대학에 진학하여 저널리스트가 되겠다는 꿈은 좌절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현재 독일의 바트 팔링보슈텔의 난민수용센터에서 이 리포트를 보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