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라는 장벽을 넘어 피난민에서 사업가 되기까지
장애라는 장벽을 넘어 피난민에서 사업가 되기까지
장애라는 장벽을 넘어 피난민에서 사업가 되기까지
부브크완가 (Bubukwanga) 경유 센터, 우간다, 7월31일 (유엔난민기구) -아담 무기쇼 (Adam Mugisho) 는 절대 게을리 앉아만 있을 사람이 아니다. 이달 초 수천명에 달하는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고향인 콩고를 떠나온지 몇일 안되어 그는 우간다 난민 경유센터내 커다란 나무 밑에 핸드폰과 라디오 등을 고치는 자그마한 수리점을 차렸다.

부브크완가 경유 센터에서 아담이 라디오 수리하는 것을 손님이 지켜보고 있다.
어릴적 앓았던 소아마비 때문에 두 다리가 마비되어 크게 낙담했을 법도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의 부모님 보다도 더 씩씩한 마음가짐으로 신발 수선을 시작했다. “(나는 항상) 내 자신을 격려하곤 했다,” 며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채 그는 말했다. “하루는 휠체어에 멍하니 앉아있는 내 모습에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고 다짐했다.” 5년 전 그가 30살이었을 때, 그는 친구를 설득해 전자제품 수리를 배웠다.
그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싫어한다며 지인에게 스와힐리어 좌우명을 영어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장애는 무능력함이 아니다.”
콩고의 국경으로부터 25km 떨어진 이 경유 센터에 도착한 직후 그는 난민들 중 처음으로 상점을 차렸다. 세계 식량 계획 (World Food Program) 에서 제공하는 끼니와 유엔난민기구와 협력단체들이 보급하는 구호품을 보완하기 위해 그는 돈을 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무 밑에 자리 잡고 있는 그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지런히 놓인 숯 위에는 그의 납땜용 인두가 놓여있는데, 이는 이곳에 함께 거주하고있는 17,000명의 난민들의 생명줄과도 같은 낡은 핸드폰과 라디오를 고쳐주는 소중한 도구이다. 하루에 약 5000~6000 실링, 즉 미국 달러 $2~2.34불 정도의 벌이가 되는데, 높은 실업률을 보이는 우간다 외곽 산맥지역에서도 이는 상당한 금액이다. 우간다 정부는 난민들이 우간다 국민들과 동일한 권리를 보호받고 또 농사일 등을 할수 있도록 특별 허용하고 있다.
“내 라디오는 오직 아담만이 고칠 수 있다,” 라며 콩고 북부 키부 (Kivu) 지역에서부터 아담을 알고 지냈던 또 다른 난민, 타반타이부 알리 (TabanTaibu Ali, 43) 가 매우 만족스러워 하며 말했다. 그는 “아담은 수리를 정말 잘한다. 이곳 우간다인들이라면 과연 내 라디오를 고쳐줄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담은 경유 센터에 함께 지내고있는 286명의 장애난민들 중 한명인데, 그곳에 함께하는 장애인들의 고충에 대해 말했다.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양손으로 기어서 일반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 다른 병에 걸리지나 않을지걱정이다” 라며 그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유엔난민기구의 사회복지사 후지 카와타 (Fuji Kawata) 는 비상시 각종 서비스 접근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하며 “지역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도록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신원 파악에 힘쓰고 있다” 고 말했다.
이를 위해 우간다 적십자사 (Red Cross Society) 의 자원봉사자들은 일일이 텐트를 방문하며 특수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파악하고 “장애인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들이 어디에 지내고 있는지를 조사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며 카와타가 덧붙였다.
이 곳 경유센터에 도달한 것 자체가 아담에게는 크나큰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에 비해 운이 좋았던 그는 “내 자전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전거가 나를 이곳까지 올수 있게 도와주었다” 며 그의 휠체어를 가르켰다.
북쪽 키부 지역의 잇따른 폭력사태를 피해 국경을 넘어 우간다로 탈출한 마이클 산드 (Michael Sande) 는 병약한 다리 때문에 기어다니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처음 반란이 일어났던 2004년 혹 2005년을 떠올리며 그는 그의 아버지가 "죽고 사는 것은 모두 네 자신에게 달렸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가족이 모두 흩어진 뒤 마이클은 주변 풀숲으로 기어가 겨우 몸을 숨기고 반란의 광란이 잠잠해 지기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참수형 당한 아버지의 시체를 마주했다. 형제들과 이웃들이 아버지를 땅에 묻자 마이클의 어린 아내가 우간다 안전지대로 그와 아이들의 피난을 도왔다.
“내 아내는 나를 등에 들쳐업고, 아이를 가슴에 안고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 고 회상했다. 콩고에서 우간다의 난민촌까지 무려 4일이라는 시간을 꼬박 걸어왔다. 그녀에게 남편을 업고 온 이유를 묻자 펠리스타 카바나코 (Felista Kavanako) 는 그저 “사랑하기 때문” 이라고 전했다.
우간다에 온 후로 다섯 명의 자녀들을 더 낳은 이 부부는 현재 우간다 정부에서 지어준 자그마한 대나무 진흙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집은 정부가 지정한 새로운 난민 경유 센터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아담은 다시 본인의 전자제품 수리 사업으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그는 난민들을 받아준 (현)체류국에 기여할 방법을 제시했다. 그 나라에 집을 짓거나 사업을 시작하면 그것이야말로 “개발” 이라며, “난민들이 귀향 할 때 그 집을가지고 돌아가진 않잖아요?” 라고 반문했다.
그는 그가 가지고있는 특별한 재주 때문에 미래가 밝다고 굳게 믿는다. 교육과 기술 육성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데, “만약 학교를 가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손기술을 익히라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본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은 마치 돈을 갖고 다니는 것과 같다. 어디를 가든지 돈은 저절로 굴러들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