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원조 삭감 #2] 빈 자리의 경계
[국제 원조 삭감 #2] 빈 자리의 경계
📑발행일 : 2025년 9월 26일
📑문서 분류 : 국제 원조 삭감 대응 보고
📑문서 제목 : 2025년 빈 자리 보고서
“살기 위해 정말 열심히 싸워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집트 카이로 외곽, 오래된 아파트의 얇은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칩니다.
심장 질환을 앓는 54세 압델아짐은 약봉지를 들고 앉아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의 의료 지원이 중단된 지 한 달, 그에겐 더 이상 건강을 지탱해 줄 약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진 속 인물은 신변 보호를 위해 가상의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고국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어요. 병원은 모두 문을 닫았고 약을 구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죠. 그곳에 남아 있는 건, 제 건강 상태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내전이 한창이던 지난해, 압델아짐과 아내는 수단의 수도 하르툼을 떠났습니다. 병원이 폐쇄되고 약국이 텅 빈 고향을 뒤로한 채 이집트에 도착한 그는,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으로 두 차례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으며 처음으로 "이제는 살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국제 원조 삭감의 여파가 현장에도 예외 없이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난민에 대한 필수 지원을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본부와 지역 사무소의 인력과 비용부터 감축해 왔지만, 이제는 제한된 자원 안에서 현장의 지원 대상까지 조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압델아짐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던 지원마저 잠정 중단될 위기에 놓였고, 약값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습니다.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상태로 다시 병세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약이 끊긴 시간은 압델아짐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갉아먹는 중입니다.
원조 삭감이 불러온 재정위기는 병원의 문을 닫게 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보호의 손길이 닿지 못한 아이들 역시 그 빈 자리 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최근 의료 지원의 범위가 줄어들면서, 긴급 우선순위 조정 중 한 난민 아동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상황에 처했습니다. 정신적 · 신체적 장애가 있어 유엔난민기구의 지원으로 하루 종일 돌봄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안전망도 온전히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가장 필요한 곳에 전하던 도움마저 점점 사라지는 참혹한 현실입니다.
2025년 3월, 이집트 카이로의 ‘리퓨지 이집트’ 클리닉에서 진료를 받는 빈혈 환아 모하메드(만 2세)
"지원이 끊기는 날은 누군가의 삶이 멈추는 날입니다. 아이들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괴롭습니다.”
유엔난민기구 아동 보호 담당자 파라 나세프는 말합니다.
그녀는 매일 비슷한 상황을 겪는 아동들을 마주합니다. 손 닿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진 거리, 닿지 못하는 거리만큼 깊어진 고립. 그 경계 너머에 놓인 아이들의 삶은 점차 침묵 속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 아동 의료 지원 중 전체 건강 상담은 7%, 정신 상담 지원은 6%, 급성 영양실조 치료는 8% 축소됐습니다. 산모 사망은 180건에 달했고, 5세 미만 아동이 전체 사망자 중 3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대부분은 기본적인 의료 지원만 제때 닿을 수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었습니다.
지난해 유엔난민기구는 이집트 내 난민과 망명 신청자 약 94만 명을 위해 1,900억 원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확보한 금액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올해는 원조 삭감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2025년, 유엔난민기구는 결국 ‘생존’만을 겨우 유지하는 응급 대응 체계만을 남기고 이집트 내 대부분의 의료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암 수술, 심장 시술, 만성질환 치료 등 응급을 제외한 치료는 모두 지원 항목에서 사라졌으며 그 여파는 2만 명이 넘는 환자에게 곧바로 닿았습니다.
2025년 3월, 수단에서 이집트로 피난 온 난민 누르 하룬은 세 살 딸 살마의 진료를 위해 카이로의 유엔난민기구 클리닉을 찾았습니다.
누르는 현재 기자의 파이살 지역에 거주하며 유엔난민기구의 현금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수단에서 분쟁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보건 시스템이었습니다. 병든 가족을 살리기 위해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향한 난민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입니다.”
유엔난민기구 이집트 사무소의 공중보건 담당자 아렘은 벼랑 끝 현실을 전합니다.
이집트 정부는 난민에게 공공 보건 서비스 접근을 허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를 이용할 수 있는 난민은 극소수입니다. 민간 병원은 턱없이 비싸고 공공 의료는 비용이나 절차상 진입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현재 150만 명 이상의 수단 난민을 수용하고 있으며 이 중 약 67만 명이 유엔난민기구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몸과 마음을 지켜줄 의료 지원은 조용히 사라진 ‘빈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난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치료를 대신 지원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환자의 병세가 악화되고 결국 생명을 잃게 될 겁니다.”
아렘은 더 이상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굽니다.
압델아짐의 곁을 지키는 아내 역시 말없이 닥쳐오는 차가운 현실 앞에 점점 무력해질 뿐입니다.
떨어진 약 봉투를 들여다보며 그는 매일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사진 속 인물은 신변 보호를 위해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이미지로 대체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난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넘지 못한 문턱 너머에는 약 봉투와 수술, 그리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과 사를 가르는 그 경계 위에 함께 서 있습니다.
멈춰 선 이들의 삶을 우리는 어디까지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