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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에서의 177일

스토리

레바논에서의 177일

2026년 5월 29일
유엔난민기구(UNHCR) 레바논 사무소 대외협력 담당관 정승현

안녕하세요. 유엔난민기구(UNHCR) 레바논 사무소 대외협력 담당관 정승현입니다. 저는 2025년 9월 8일부터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하 코이카)의 분쟁취약국 지원 사업을 담당하게 되어 레바논 베이루트(Beirut)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의 177일은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었습니다.

Part 1 - 상처 위에 세워진 나라로

Lebanon. Beirut

레바논에 도착하자마자, 이 나라는 오랜 시간의 아픔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 15년간 이어진 내전의 상흔, 2011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리아 난민 사태, 2019년부터 시작된 전례 없는 경제위기, 2020년 베이루트 항만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발, 그리고 2024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충돌까지, 이 모든 사건들은 레바논이라는 작은 나라에 겹겹이 쌓인 위기의 흔적이었습니다.

유엔난민기구 레바논 사무소에서, 저는 시리아 난민 이슈의 최전선에 있는 현장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국가 전체 인구가 6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레바논에서 약 130만 명에 달하는 시리아 난민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단순한 수치를 넘어 제한된 자원 속에서 난민과 지역사회가 공존해야 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과 빠르게 돌아가는 업무 속에서 모든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현장의 필요를 반영하고 이를 실제 지원으로 연결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하며 저의 역할은 현장의 상황과 지원을 잇는 하나의 연결고리라는 것을 점차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2024년 말 시리아 상황 변화와 함께 일부 난민들이 귀환을 고려하거나 준비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귀환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상당수는 레바논 내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코이카의 지원을 통해 유엔난민기구는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난민뿐 아니라 취약한 레바논 주민들도 함께 지원하며 지역사회의 안정과 기본적인 생활 유지를 돕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난민들은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강한 회복력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 어른들은 힘든 현실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려는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유엔난민기구를 비롯한 여러 인도주의 단체에 대한 자금 지원이 급격히 줄면서 난민들의 일상은 나날이 더욱 취약해지고 있습니다.

Part 2 - 대한민국의 지원이 닿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

Lebanon

레바논 담당자로서 사업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베카(Bekaa) 지역의 소도시 주브 자닌(Joub Jannine)을 방문했을 때, 겨울철을 앞두고 현장에서 만난 많은 난민 가정은 임시로 지어진 거주지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특히 한겨울에는 낮은 기온과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인해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유엔난민기구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 하는 난민 가족을 위해 코이카 지원의 일환으로 임시거처(Shelter)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난민들에게 방수포, 단열재, 목재 등으로 구성된 방한 키트를 배포하고, 임시 거주지의 보수 및 개선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난민 가정이 보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Shelter – 방한키트 with KOICA 스티커

올해 2월에는 주레바논 한국 대사관과 함께 지역사회개발센터(Community Development Centre, CDC)를 방문하였습니다. 지역사회개발센터는 유엔난민기구의 커뮤니티 기반 보호(Community-based Protection) 활동으로, 난민들이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난민들은 이 센터를 통해 직업훈련과 생계 활동을 지원받으며 자립 기반을 마련하고, 특히 아동과 청소년들은 컴퓨터 교육 등 기초 IT 역량 강화 훈련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지역사회개발센터는 법률상담, 정보 제공, 심리사회적 지원, 직업훈련 등 다양한 서비스를 한 곳에서 통합적으로 제공하며, 난민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까지 모두가 필요한 지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 레바논 사무소 대외협력 담당관 정승현

저는 이 지역사회개발센터에서 가족과 함께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10살짜리 시리아 아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되는 동안 레바논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한 번도 시리아에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제야 가족과 함께 시리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향’이라는 곳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낯선 땅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며, 이 위기가 단순한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라 한 세대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가족들 역시 유엔난민기구의 지원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다시 고향으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3월 2일 새벽 2시경, 잠을 자던 중 포탄 소리에 잠에서 깨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폭음은 곧 상황이 급변했음을 직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이어지던 긴장이 결국 현실이 되었고,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충돌이 다시 격화되면서 공습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Part 3 - 새벽 2시, 포탄 소리에 잠에서 깨다

새벽에 첫 폭음을 듣는 순간,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이 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곧바로 동료들로부터 안부를 묻는 연락이 이어졌고, 저는 그날 밤 뉴스를 지켜보며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군사 행동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불과 몇 킬로미터 밖에서 터진 폭음과 섬광이 제가 머물던 곳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날 밤, 레바논 전역이 긴장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후 전사적으로 재택근무 지침이 내려져 집에서 업무를 이어갔지만, 긴급 상황 속에서 업무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조용하게 느껴졌습니다. 각자 맡은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모두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고, 일상적인 업무와 비상 상황이 동시에 이어지는 묘한 긴장감 속에서 하루가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중 같은 날 저녁, 유엔 안전보안국(UN Department of Safety and Security, UNDSS)이 주도한 안전관리팀(Security Management Team) 회의를 통해 일부 인력의 철수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피할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결국 저는 분쟁 발생 이틀 만인 2026년 3월 4일, 튀르키예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곧바로 한국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당시 중동 전역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항공편은 잦은 취소와 지연이 반복되었고 항공료 또한 크게 치솟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약 일주일간 이스탄불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본 후 인천행 비행기에 올라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Lebanon. Aftermath the airstrikes in Beirut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도 잠시, 여전히 현장에 남아 있는 동료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원격으로 업무를 이어 나갔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대응을 이어가고 있는 동료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Lebanon. Emergency response for displaced families

그러나 누구보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현지 주민들이었습니다. 3월 2일 이후 불과 몇 주 사이에 약 104만 명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7,700명 이상의 부상자와 2,4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보고되는 등 피해는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고, 집단 쉼터와 임시 거주지에는 과밀된 인구로 긴장감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Lebanon

저는 현재 한국에서 원격으로 업무를 이어가고 있지만,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베이루트로 복귀할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상과 기억을 쌓아온 그 도시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은 것이 무너져 있을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 유엔난민기구의 역할이기 때문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매일 더 분명해집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 레바논 사무소 대외협력 담당관 정승현

역설적으로, 이번 대피 상황을 통해 유엔난민기구가 현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 지원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지를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그 역할이 가능했던 것은, 대한민국 정부와 코이카의 지속적인 신뢰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지원을 현장으로 잇는 유엔난민기구의 일원으로서, 그에 걸맞은 책임감을 가지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날까지 한국에서 현장을 지원할 것입니다.